'장미의 이름'은 아는 것 정말 많고 글을 재밌고 어렵게 쓰기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의 첫 소설입니다.
사실 읽은 지는 서너 달 된 것 같은데 계속 잊혀져 가는 것 같아서 더 까먹기 전에 흔적이라도 남기려 포스팅을 하게 됐네요.
이 책은 추리소설입니다.
중세의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수도원장의 부탁으로 이를 수사하는 윌리엄신부가 겪는 7일간의 이야기입니다.
윌리엄신부의 수행원(?)인 아드소가 화자로 이야기 자체는 아드소가 늙어서 사건 당시를 회상하는 구성입니다.
범인이 누구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말해 버리면 스포가 될테니 넘어가고 제가 중간에 인상깊게 봤던 등장인물들의 논쟁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가 얼핏 이야기 흐름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지루한(?) 논쟁이 자주 등장해서 입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으면 이 논쟁이 이야기 흐름에 어떻게 연관이 되고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참고로 지금 틈틈이 읽고 있는 에코의 다른 작품인 '바우돌리노'도 마찬가지로 이런 논쟁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논쟁에서 에코의 박학다식함을 느끼곤 합니다.
제가 '장미의 이름'에서 흥미롭게 본 논쟁은 이단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권력화된 종교의 부정부패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단이라는 희생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나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가톨릭의 교리라는 게 니케아공의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맛에 맞는 것만을 골라낸 것 처럼 모든 종교의 교리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애초에 이단이라는 단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단'이라는 단어가 갖는 힘이 막강한지라 아직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타 교파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땅에 존재합니다.
또한 대한민국에는 '이단'이라는 단어의 다른 형태인 '빨갱이'라는 단어도 참 자주 등장하지요.
'장미의 이름' 전체에 걸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단어는 '요한 묵시룩'입니다.
'요한 묵시룩'은 성서의 맨 마지막에 있는 부분으로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섬찟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 살짜리 아이도 종말에 대해서 코웃음 칠 정도로 사람들이 과학에 익숙한 시대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요한 묵시룩'을 보면서 벌벌 떨면서 우왕좌왕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말이라는 비과학적 요소만을 비웃을 수 있을 뿐 여전히 우리에게 과학적인 통계나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조작된 허상에는 중세사람들 만큼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중세 사람들이 '요한 묵시룩'에 동요되던 것 이상으로 우리도 쉽게 동요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죠.
'장미의 이름'은 불합리한 사회(중세유럽은 종교가 곧 사회인 시대였기에)의 단면인 '이단'과 세상의 종말을 예견하는 '요한 묵시룩'을 함께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윌리엄신부는 모국인 영국의 경험주의적 사고와 아랍의 자연주의적 사고(과학적 사고)를 지닌 인물입니다.
불합리한 사회와 민중을 동요시키는 조작된 정보와 이를 해결하는 객관적인 사고...
분명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